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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안정환(조금 김)

몹시흥분골초

16.01.11 10:10:44추천 21조회 19,115

 안정환은 무척 화려한 선수다. 한국에서는, 아니 아시아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차원 높은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외모는 조각처럼 잘 생겼다. 이 귀공자 같은 축구선수를 우리는 테리우스, 또는 판타지스타라고 불렀다. 안정환이 아쉬운 은퇴를 선언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화려했던 안정환의 선수 생활을 되짚어 보고 있다. 하지만 안정환의 인생이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늘은 화려함 뒤에 가려진 안정환의 슬프고 외로웠던 시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정환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골보다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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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한 벌 뿐이었던 패셔니스타

 안정환에게는 남다른 가족사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면 아마 더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 그의 힘겨웠던 유년 시절을 이야기 할 때 왜 그가 아버지 없이 자랐는지, 외할머니 품에서 커야 했는지를 소개하는 것도 언론인으로서의 의무이지만 그 전에 선수에 대한 사생활은 어느 정도 보호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안정환은 자신의 가족사를 자극적으로 다룬 언론 보도로 인해 “한국에 들어오기 싫었다”라고 밝힐 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선수의 사생활을 보호하려 한다.

 안정환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친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그는 살 집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저기 얹혀사는 신세였다. 돈암동, 흑석동, 신길동, 부천, 수원 등 한 학기에 10번 넘게 이사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다. 배불리 먹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패셔니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안정환이지만 당시에는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 씩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넌 옷이 그거밖에 없니?” 친구들은 그런 안정환을 놀렸다. 그럴 때면 안정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 항상 배고팠던 안정환은 수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모 집에 얹혀살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서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던 안정환은 “축구부에 들어오면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축구부로 찾아갔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친구들이나 한쪽 부모가 없는 친구들이 안정환과 함께 우르르 축구부로 향했다. 안정환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시합이 끝나면 자장면도 사 준다고 하더라고요. 빵과 우유, 자장면에 혹했죠.”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프랑스 유명일간지 ‘르 몽드’는 “만화에 나오는 로마왕자 같은 외모의 안정환은 생김새와는 달리 춥고 배고픈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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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판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안정환

 안정환은 노량진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운동이 끝나면 곧바로 한강둔치로 향했다. 지금은 한강둔치가 시민들의 공간이 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강둔치는 을씨년스러웠다. 무당들이 한강 주변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굿도 자주 열었다. 굿이 끝나면 떡과 과일을 그 자리에 놓고 갔는데 안정환은 무당들이 굿판을 벌인 뒤 남은 음식들로 허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에게 있어 한강둔치의 떡과 과일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면 배추밭에 가서 배추 밑동을 뽑아 먹었다. 안정환의 외할머니는 “배불리 먹지 못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유난히 작던 (안)정환이의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집 없이 방황하던 안정환은 항상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축구를 시작한 무렵에는 이모와 이모부의 부부싸움이 잦았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밤늦게 이모 집으로 돌아와 문을 살짝 열고 집안의 동태를 파악하는 게 안정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 11시건 12시건 골목에 쭈그려 앉아 싸움이 잦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머, 어린 애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니? 너 집 없니? 이거라도 먹어.” 당시 이모 댁은 중앙대학교 근처 언덕이었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면 대학생 누나들이 오가다가 건네 준 과자와 사과로 끼니를 대신했다. 힘든 훈련을 마친 어린 안정환에게는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수원에 살 때는 학교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무려 두 시간이나 가야했다. 오전 운동을 해야 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이는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얹혀살면서 새벽부터 학교에 간다고 부산을 떠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두 시간 넘게 만원버스를 탄다는 것도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안정환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 그냥 학교에서 자자.’ 안정환이 생각해 낸 곳은 학교 창고였다. 그는 밤 늦게 몰래 학교에 남아 창고로 숨어 밤을 지샜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울 11살의 나이에 안정환은 혼자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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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이 과일을 잘 깎는 이유


 안정환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언제나 노력하는 선수였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실력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난생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청소년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이건 무슨 과일이죠?”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한 안정환에게는 낯선 과일이 있었다. 바로 오렌지였다. 안정환은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오렌지라는 걸 직접 봤다. 생전 처음 본 오렌지를 너무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남은 오렌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동료들은 “(안)정환이는 먹을 것만 보면 욕심을 부린다”고 놀렸다. 하지만 안정환은 이 오렌지를 아끼고 아껴 집까지 가져왔다. 외할머니를 위해서였다. 생전 처음 먹어본 오렌지를 외할머니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안정환은 운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합숙을 하면서도 시간이 나면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도 직접 그의 손으로 지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목동역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죽을 만큼 고생하면서 열심히 내 손으로 목동역을 지었다.” 결혼한 뒤 그의 아내는 안정환이 깎은 과일이 너무도 가지런해 놀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럴 이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분이었다. 곱상한 외모지만 안정환은 막노동부터 웨이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다.

 “우리 학교로 오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마.” 안정환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유명 대학교에서 그의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졌지만 그는 축구에서는 다소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대학교를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안정환이라면 충분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에 입학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그는 아주대를 택했고 팀을 대학 최정상으로 이끌었다. 1997년 대학 선발에 뽑혀 시칠리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날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이동, 아주대 소속으로 대학축구연맹전 결승에 나서 두 골을 기록한 건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당연히 프로팀에서도 그를 눈여겨봤고 졸업과 동시에 부산대우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때까지 외할머니에게 아파트를 장만해 드리고 어머니의 빚을 갚으며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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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날아간 테리우스의 시련

 K리그에서 화려한 플레이와 빛나는 외모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안정환이 혜성 같이 등장해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1999년 부산대우는 483,655명의 경이적인 홈 관중을 불러 모아 K리그 사상 최초로 한 시즌 40만 관중시대를 열었다. 당시 부산대우는 2만 5천 석의 관중석 규모를 훨씬 웃도는 3만 명의 관중을 세 경기 연속으로 불러 모으며 ‘안전사고 위험 지대’로까지 불렸다. 1999년 준우승 팀에서 리그 MVP를 수상한 것도 안정환이 리그 최초였다. 안정환은 전국구 스타가 됐고 안정환이 되고픈 남자들은 머리띠를 하며 그를 흉내 냈다. 각종 광고 출연 등으로 최고의 주가를 달린 것도 이때였다. 그는 실력과 상품성에서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이 실력과 인기를 등에 업고 이탈리아 페루자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탈리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동양 선수를, 그것도 한국인을 철저히 무시했던 당시 분위기상 안정환을 인정해주는 동료는 없었다. 안정환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벽 보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페루자 측에서는 일본인들이 나타카 히데토시 영입 이후 티셔츠 구입 등 눈에 띄게 구단 매출을 올려준 것에 비춰 안정환 영입으로 한국인 마케팅을 기대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력으로 입증했다. 5번째 출장이던 아탈란타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로 데뷔 첫 골을 쏘아올린 그는 곧바로 치러진 바리전에서 연속골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고 우디네세전에서는 두 골을 넣으며 이후 줄곧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이 경기에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은 이후 괘씸죄에 걸려 페루자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페루자 가우치 구단주는 국영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녀석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샌드위치 하나 살 돈 없는 ‘길 잃은 염소’와 같았다. 자신을 키워준 이탈리아를 몰라보고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 그는 더 이상 페루자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안정환에게 살해 협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의 차를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안정환은 짐 정리도 대리인을 시켜서 해야 할 정도로 골든골 하나로 이탈리아인들에게 미움을 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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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갚기 위해 뛰는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블랙번과 협상이 마무리되고 있었지만 페루자 측에서는 임대 후 완전 이적조항을 앞세워 “페루자 허락 없이는 어떤 팀도 갈 수 없다”고 주장했고 안정환을 노렸던 프리미어리그 여러 구단에서는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안정환 영입에 뛰어 들었다가는 분쟁이 생길 것을 우려해 난항을 표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더 있었다. 페루자와 현대산업개발의 분쟁으로 안정환은 몸값이 점점 떨어졌고 페루자는 이적료 수입에 부산아이콘스가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소했다. 결국 FIFA는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안정환 측이 페루자에 380만 달러(한화 약 35억 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35억 원의 갚지 못하면 안정환은 그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페루자에서 두 시즌 동안 연봉 13억 원을 받은 안정환은 이 중 대부분을 어머니 빚 갚는데 쓴 터라 돈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안정환에게 손을 내밀지 않던 그때 일본이 움직였다. 놀라운 건 전문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아닌 연예기획사에서 안정환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PM이라는 일본 연예기획사는 페루자에 대신 35억 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안정환과 계약했다. 안정환으로서는 35억 원이라는 빚을 갚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PM과 손을 잡아야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이렇게 일본 연예기획사 소속의 연예인 아닌 연예인이 됐다.

 PM은 안정환을 이용해 돈벌이에 나섰다. 안정환을 J리그로 진출시킨 뒤 시즌이 끝나면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 출연에 이용했다. 당연히 일본에서 본전을 뽑아야 하는 PM은 첼시와 라치오,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샬케04, 블랙번 등 유럽 구단의 입단 제의를 모두 거절했고 최전성기에 있던 안정환은 어쩔 수 없이 유럽 진출의 꿈을 접고 J리그에서 3년 동안 뛰어야 했다. 그런 안정환은 결국 J리그 진출 3년 만에 요코하마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35억 원을 다 갚고 홀가분한 신세가 됐다. 이때 안정환의 나이는 이미 서른 줄로 접어들었다. 당시 나고야에서는 안정환의 기량과 상품성을 인정해 30억 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했지만 안정환은 뒤늦게라도 유럽에 다시 진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액을 거절하고 프랑스 FC메츠로 떠났다. 그의 메츠 시절 연봉은 고작 연봉 8억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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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정환에게 무엇을 줬나

 그는 3년 만에 유럽 무대로 복귀했지만 메츠가 리그 최하위를 면치 못하자 6개월 뒤 분데스리가 뒤스부르크로 이적했다. 하지만 뒤스부르크 또한 리그 최하위로 강등되자 계약을 해지한 후 반 년 동안 무적 상태로 지내다가 2007년 K리그 수원에 입단, K리그에 7년 만에 복귀했다. 수원 시절에는 2군 경기에 나서 가족에 대해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상대팀 팬과 충돌해 벌금 1천만 원의 중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그 어떤 비난도 묵묵히 감수했던 안정환이지만 차마 가족을 욕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경기 도중 관중석으로 진입해 팬과 충돌한 안정환은 벌금을 내고 사과문을 썼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켰던 팬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부산과 다롄을 거친 그는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더 오랜 시간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를 놓아줘야 할 때가 왔다. 우리가 그에게 해준 것이 많다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가 현역 생활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정환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이탈리아에 진출했을 때는 일본인들처럼 티셔츠를 사주지 않아 구단에서 미운 오리가 됐고 국제 미아가 됐을 때도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대놓고 가족 욕을 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안정환에게 더 많은 걸 보여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안하다.

 그럼에도 안정환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추억을 선물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혜성처럼 K리그에 등장해 우리를 설레게 했고 20세기 마지막 한일전에서는 일본의 자존심을 꺾는 멋진 골로 우리를 열광시켰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의 잊지 못할 활약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선명히 남아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원정 첫 승을 거둔 것도 그의 발이었다. 우리는 준 게 없는데 안정환은 너무나도 많은 걸 줬다. 그래서 그의 은퇴가 더 아쉽고 슬프다. 축구를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선수는 몇 없었다. 안정환이 공을 잡으면 무언가 해줄 것만 같은 그 느낌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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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판타지스타, 안정환

 우리는 안정환의 화려한 모습만 봐 왔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 때문에 그를 풍족한 환경에서 축구에 매진하는 이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얼굴만 믿고 공 차는 선수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선수보다도 더 많은 시련이 있었다. 외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라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처음 축구화를 신은 소년은 훗날 한국 축구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 안정환이 매일 새벽 남몰래 땀과 눈물을 흘렸던 시절이 있었기에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먹을 게 없어 굿판을 전전했던 소년, 학교 창고에서 몰래 잠을 청하던 소년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학연과 지연이 판치는 세상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정상에 우뚝 선 안정환은 축구를 넘어서 이 세상에 큰 메시지를 던져줬다. 마지막으로 그가 던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릴 적에는 어려운 형편을 많이 원망했어요. ‘아,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요.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 너무 마음이 편해서 쉽게 운동을 포기했을 것 같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독기를 품고 노력해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가난에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지금껏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는 비록 그라운드를 떠나지만 언제나 우리의 판타지스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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