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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우리의 영토, 간도

岳飛

05.09.07 01:42:07추천 1조회 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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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上左) 1924년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에 게제 하였던 바티칸 교황청이 한국에 있어서의 교구의 관할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간도와 연해주까지 우리 나라의 영토로 표시 되어 있다.

사진2 - 上中,上右) 간도 관련 사진

사진3 - 下左) 백두산 남동방 4km,해발 2,200m 지점에 세워둔 백두산 정계비.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철거해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진4 - 下中) 백두산 정계비 비문

사진5 - 下右) 백두산 정계비 탁본


[ 간도 역사 이야기 ]

출처 : http://netizen.khan.co.kr/gando/

간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옛날 간도 지역은 백두산과 송화강 및 흑룡강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모두 만주 일대를 지배한 대국이었으며 특히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라 하여 영산으로 여겨왔다.

고려 때만 해도 1108년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동북 9성 가운데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지며, 간도 땅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우리 민족의 영토로 확실한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간도는 주변국 사이에 놓여있는 완충지대 정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1616년 만주에 청나라가 건국된 후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인의 유입이 빈번하고 이로 인해 양국간에 군사적·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당시 간도 지역은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고, 주민들도 국경을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생활의 편의에 따라 유동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1627년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지역에 일종의 완충지역인 공광지대(空曠地帶)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1689년 청-러 간에 조약이 체결되어 흑룡강 상류지역이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청이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두었던 간도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러시아가 흑룡강 연안으로 남하하면서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709년부터 청은 백두산 일대의 산세와 지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710년 조선인 이만건(李萬建) 외 8명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사람 5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관계는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청의 강희제는 목극등 일행에게 명을 내려 1712년 서쪽으로는 압록강과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한다는 정계비(定界碑)를 백두산 분수령에 세우게 된다. 결국 이 때 서간도 1만9천여㎢의 영토가 청나라 땅인 양 되어버렸고, 토문강을 경계로 한 동쪽의 북간도 지역만이 조선의 땅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정계비에 언급된 지명에 대한 해석마저도 엇갈려 양국 영토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은 옛 종주국 행세와 오만한 태도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조선측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우리 국토는 한 치도 줄일 수 없다고 강하게 항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청은 토문강(土門江)-도문강(圖們江)-두만강(豆滿江)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며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토문강은 중국의 여러 지도에도 송화강의 상류로 표시되어 있는 점을 증거로 제시하며 두만강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맞섰다.

[중국 전요지(全遼志)에는 토문강의 이름을 토문하(土門河)로 적고 있으며 송화강의 원류라고 밝혀 놓았고, 정약용의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에도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 표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규장각(奎章閣)에서 찾아낸 백두산 정계비도(定界碑圖)에도 토문강원이 송화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후 조선과 청은 간도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몇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끝내 간도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분쟁은 러·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우리 땅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리고 만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2004년. 새해 첫날부터 신사참배에 나서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를 더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논쟁의 여지도 없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 술 더 뜨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간도영유권 문제에 있어 당사자인 중국도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가동하며 영토 문제에 있어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있다.

영토 문제는 대개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만료되는 것이 국제법의 통례라고 한다. 독도는 분명한 우리의 영토임에도 일본이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시효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향후 6년 후인 2009년에 100년을 맞기 전에 우리도 공식적인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일제 치하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광활한 우리의 북방영토 간도. 그 동안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 분단의 아픔에만 초점이 맞춰져 간도를 되찾기 위한 어떤 노력도 부족한 상태였고 지금은 관심마저 끊긴 상태이다.

간도는 가까운 장래에 동북아 중심기지로 부각될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다. 우리 민족은 '간도의 꿈'을 다시 키워야 한다. 간도를 정당한 권리 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 그동안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기회가 없었더라도 이제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을 펼쳐야 할 시점인 것이다.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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