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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보는 유튜브] 레이먼드 챈들러

로오데

21.12.29 10:46:37추천 2조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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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저/승영조

 

탐정소설을 오락물에서 문학의 자리로 끌어올린 하드보일 문체의 마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잘 팔리는 작가만 살아남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챈들러는 살아남았다. 공을 ㄷ르인 것에 비해 수입이 빈약했던 것이지 인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을 들인 만큼 완성도도 높아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 문학사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챈들러 덕분에 우리는 그 시대 삶의 관련을 더욱 다양하게 음미할 수 있고, 고전 명작이라는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리얼한 삶의 이면과 미국의 맨 얼굴을 엿볼 수도 있다.

[옮긴이의 말]

 

펄프 픽션의 정점을 찍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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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 fiction magazines

 

 ‘펄프 픽션(pulp fiction)’ 또는 ‘펄프 스토리(pulp story)’라는 말을 펄프 매거진(pulp magazine)에서 유래한 것이다. 펄프 매거진은 1896년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에서 발행된 저가의 대중소설 잡지를  ㄱ가르키는 말인데, 1920년대<로스엔젤레스 타임스>지에서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로 18센티미터에 세로 25센티미터의 판형에 128쪽 정도로, 갱지에 인쇄한 이 잡지는 초기에 10센트(오늘날의 생활수준으로 환산하면 약 8,000원)에 팔렸다. 고급 종이에 인쇄한 잡지가 25센트 하던 시절이었다. 펄프 매거진 특유의 소설은 선정적이거나 충격적이고 대중적인 소설로 대개 격이 낮았다.

 펄프 매거진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1920~1930년대이다. 

 전형적인 펄프 픽션 작가는 밥벌이를 위해 빠른 속도로 다작을 했다. 요즘 한국의 양판소(양판형 판타지 소설) 작가와 비슷한 셈이다. 그러나 챈들러는 집필을 하는 데 아주 긴 시간 공을 들였다. 동료 펄프 작가인 조지 하먼 콕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글쓰기로 돈을 벌지 못했어. 너무 느리게 쓰고 너무 많이 버렸거든.”또 로버트 호건 부인에게는 이렇게 썼다. “나는 본격적소설을 쓰는 것만큼 공들여 펄프 스토리를 썼는데, 공을 들인 것에 비해 수입은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잘 팔리는 작가만 살아남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챈들러는 살아남았다. 

 특히 레이먼 첸들러는 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와 더불어 하드보일 탐정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미국 대중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챈들러를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영웅”이라고 일컬었다. 폴 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고, 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결코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첫 장편 [빅 슬립]은 2005년 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100대 영어소설에 들었고, [기나긴 이별]은 <히치콕 매거진>선정 세계 10대 추리소설에 꼽혔다. 그의 장편 7편 가운데 6편이 영화화되었고, 거듭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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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필립 말로는 셜록 홈스와 더불어 불멸의 탐정이 되었다. 챈들러는 에세이 [살인이라는 단순한 예술]에서 이렇게 썼다.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들을 지나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 않고, 물들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필립 말로가 바로 그 남자다.

 

 대중들은 셜록 홈스, 에르퀼 푸아로 등 영국 탐정에 익숙 할것입니다. 하지만 미국 스타일의 땀내 나는 탐정 필립 말로의 매력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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