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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21세기 국제정치와 투키디데스

로오데

22.08.15 14:07:45수정 22.08.15 14:13:50추천 8조회 7,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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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D. 카플란 저/이재규 역 

 

들어가면서…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세계 정치는 현실주의적 윤리에 기초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혹은 악한가?” 현실주의 윤리와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전제하여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문자 그대로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홉스는 “최고의 미덕은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과는 어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담을 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홉스에 따르면, 이타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원래 인간은 욕심이 많을 뿐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인간의 자연 조건이고 자유는 오직 질서가 확립된 후에만 제기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보다 큰 권위에 일부 양도하게 되는데, 그 권리를 양도받아 개인들을 지켜주고 분쟁을 정의롭게 해결해주는 실체를 홉스는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곧 국가를 암시하는 것은 다 아는 사살이다.

 

 그러나 주권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 사회는 리바이어던이 존재 하지 않는다. 냉전 종식 이후 리바이어던이 없는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가 저자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 역할을 UN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하지 않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겠지만,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UN과 같은 국제 기구는 초강대국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범위 안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희생을 내건 기독교의 윤리는 개인에게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모지만 사회와 세계라는 보다 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보다 크고 현실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적이고 작은 이해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미덕인가?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군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용인하고 평화를 지키려 했던 카터보다 공산주의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레이건이 현실적 도덕적인 지도자이고, 테러를 묵인했던 클린턴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부시 대통령이 훨씬 도덕적이라고 저자는 보았다. 

 

 테러집단들이 첨단무기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는 지금, 기독교적 성선설적 외교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잘 무장하고 있다. 전사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응 속도이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법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를 거부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손자는 전쟁의 발발은 정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전쟁에서 최고의 목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치의 실패에 따른 폭력적 결과인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전쟁은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불가피한 정치의 연장이다. 자국의 이익을 전략적,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냉정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나 하는 사이비 윤리가 아니라. 전쟁의 무서움을 알고 또 그것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도덕적 행동이다. 

 

 저자는 “미래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ㅇ르면 안된다. 이 세상 어느 시대 모든 것들은 고대에 그 전례가 있었으니까”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위기가 큰소리치며 험한 파도를 헤치고 그 모습을 나타내면, 오늘날 지도자들은 세계라는 것은 “현대”도 아니며 더 나아가 “탈현대”도 아니며, 오직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의 본질적으로 전쟁에 관한, 보다 정확히 말해 국제정치학에 관한 책이다. 

 

 

 

1장 

‘현대’ 세계란 없다. (THERE IS NO ‘MODERN’ WORLD)

 

 미래의 위기들이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며 들이닥칠 때, 세계는 ‘현대’도 ‘탈현대’도 아니며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는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최고 철학자들이 이해했고, 또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그 해법을 알았던 바로 그 세계이다.

 

 

 20세기의 악몽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괴물같이 등장한 포풀리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권력은 신기술에 의해 증폭되었다. 나치당은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으로서 출발했는데. 1919년 뮌헨의 열쇠수리공 안톤 드렉슬러가 조직했고 그 이듬해 히틀러가 당수가 되었다. 볼셰비키 또한 정치적 소요를 틈타 등장했으며, 나치와 마찬가지로 사회혁명이라는 꿈을 이용했다. 나치와 볼세비키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산업시대의 발명품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소위 유토피아적 공동체 구축을 통해 노동직약적 산업화를 추진했디만,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의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최소 2천만 명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는 21세기의 지표가 될 자격이 없는데도 오직 바보들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운동이 지금도 무질서를 야기하고 또 정치적, 경제적 형명을 요구하면서 세계를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은 특히 관심의 대싱이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이 신기술, 민족적 열망, 그리고 그들 국가 내부의 분열과 겹쳐진 포퓰리즘 운동으로 들끓고 있다.

 

 포퓰리스트들의 분노는 사회적, 경제적 긴장에 의해 촉발되지만, 때로는 지구가 점점 더 도시화되는 데 따르는 인구증가와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확대되기도 하였다. 앞으로 수십 년 내에 20억 또는 30억 이상의 인구가 개발도상국들의 방대하고 열악한 도시들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 정보의 확산으로 야기 되는 복잡한 이슈들은 새로운 분열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모든 사태의 전개를 어두운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미래가 틀림없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외교정책의 위기가 항상 그런 면에서 발생되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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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정책결정자들은 민족적, 종교적 소란이 정치적 억압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민주 사회가 그토록 혐오하는 폴력은 종종 정치적 자유에 의해 유발된다. 저임금에 시달리고, 일자리도 없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민족과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수많은 노동자들보다 더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이들도 없고, 규율과 올바른 방향 제시가 필요한 이들도 없다. 

 

 특히 평화 중재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평화 회담은 권력이 집중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강력한 권력자들만이 평화 유지에 필요한 역사적 전환을 정당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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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라는 말 그 자체가 우리의 삶과 시대를 과거와 단절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현대’ 사상, ‘현대’ 정치, ‘현대’ 건축, ‘현대’ 음악 등과 같은 표현은 과거의 연장이나 과거에 대한 대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현대’라는 용어는 진보를 축복하는 말이다. 우리 자신과 기술이 보다 더 ‘현대적’이 될수록-우리의 삶이 기계화되고 추상적이 될수록- 우리의 본능은 더욱더 반항적이 되고, 비록 포착하기는 어렵겠지만 한층 더 교활하고 사악해질 가능성이 있다. 

 

 전자통신은 직접적인 대면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 없이 훨씬 더 쉽게 잔혹행위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얼굴을 맞대는 회의를 없애고 전자통신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회사들에서 기업 권력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행사되었다고 한다. 

 

 능력주의 또한 인간의 공격성에 기름을 붓는데, 그 이유는 능력주의가 많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야심을 성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서로간에 필사적인 경쟁을 하도록 유도한다. 기술 진보로 인해, 앞으로 국가들 간의 관계나 다른 여러 정치 집단들 간의 관계가 한층 더 조화롭거나 현명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국제 문제에는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종종 거기에는 해답이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과 불만족스런 선택뿐이다.

 그것이 바로 1927년 조지 마셜 장군이 조지아주의 포트베닝에 있는 보병학교 사령관이 되었을 때, ‘해결책’을 강조한 교범을 폐기하고 그것을 장교들이 ‘주도성’과 ‘판단력’을 갖추도록 교육시키는 ‘현실적인 훈련들’로 대체했던 이유이다. 예비 대통령과 국무장관들을 위한 교범에는 포트베닝에서 보여준 마셜 장군의지혜가 반영되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물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 몰락의 시대를 적어도 마음속으로 되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기본적인 국제 문제에 대해 폭넓은 지혜와 깊은 확신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겠는가.

 

 마셜 장군은 고대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리더십을 위한 새로운 규칙들에는 고대의 역사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고대의 역사는 21세게 초반 몇 십년 동안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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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한 책이다. 나는 특정한 정책에 관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직감이 아닌 사고의 결과물로서 정책에 관해 쓸 예정이다. 마셜과 같은 노련한 정책결정자달은 감정이 아니라 필요와 이익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했다. 마셜 플랜은 유럽에 대한 선물이 아니라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필요와 이익이 적절히 고려되었을 때, 역사는 그러한 사고를 ‘영웅적’이라 서술한다.

 

 외교정책의 위기들은 전투와 같다. 국내 정치는 통계적 연구결과를 활용할 수 있고, 행정부와 입법기관들 간의 협상을 통해 도출되는 경향이 있지만, 외교정책은 종종 폭력적이고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해외 상황,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의해 더욱 복잡해지는 사태들을 파악하기 위해 순전히 직감에 자주 의존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기술이 그것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제도들보다 더 빨리 발전하는 세계에서-심지어 국가들 자체도 도시화와 정보화에 의해 생각 이상으로 약화되고 변형되고 있다-외교정책은 과학이라기보다 영구적인 위기 관리의 기술이 될 것이다. 

 

 미래의 위기들이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며 들이닥칠 때, 세계는 ‘현대’도 ‘탈현대’도 이니며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의 지도자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는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최고 철학자들이 이해했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그 해법을 알았던 바로 그 세계이다. 또한 회의주의와 건설적인 현실주의라는 고대의 전통을 드러내보였던 조지 마셜과 같은 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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