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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함께] - 3. 가난한 순례자

도리돌2

20.09.13 00:59:36수정 20.11.26 11:50:15추천 2조회 1,476

숙소와 정원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식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양했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그나마 구분이 되는 영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외에 정말 다양한 언어가 식당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 가장 크고 많은 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단연 한국어였다. 식당에 가보진 않았지만 지금 이곳 수비리(Zubiri) 공용 알베르게(Municipal Albergue)에 묵고 있는 한국인 7명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모두가 즐겁게 떠들고 식사를 나누는 시간이니 그들의 소음 자체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측은지심이 다가올 것을 경계하는 내 가난한 마음과 가벼운 주머니가 문제였다.

 

사실 그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래의 젊은이-여성들이 섞인 무리, 외로움과 심심하면 달래줄 누군가, 이곳에 대한 정보를 나눌 기회, 그리고 결정적으로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장점은 내 다짐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단점은 하나뿐이다. 바로 ‘돈’이다. 아직 어둠이 찾아오기 전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인근 식료품점에서 장을 봤다. 물건을 구입하고 지출금을 인원에 맞게 나눴으니 개인이 부담하는 돈은 그리 크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사소한 몇 푼마저 내겐 부담이었다. 고민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장점의 매력이 아무리 크고 단점이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없는 돈을 갑자기 만들어 낼 수 없는 노릇이니…….

 

요리 하느라 부산스럽던 소리가 어느새 잦아들었을 때 누군가 어둠을 더듬어 숙소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상도 했거니와 실루엣만으로도 어제 처음 만난 그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른 방에 묵고 있던 그가 들어온 이유는 분명했다. 내게 식사를 권유하기 위함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선 ‘한 번쯤’이라며 외쳐댔지만 그 한 번이 지속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기에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곁까지 다가왔던 그의 발걸음 소리는 이내 숙소를 나가 정원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끊겼다. 그리고 동시에 침대에서 내려와 배낭을 열어 아침에 사고 남은 빵과 물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솟구쳤지만 허기 앞에선 그저 사치에 불과했다. 이미 마를 대로 말라 겉이 딱딱하고 거칠어진 빵을 힘겹게 몸속에 구겨 넣었다. 어제를 교훈 삼아 아끼고 아껴 반 이상을 남겨놓았지만 몸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이 모든 행동을 알베르게 구석에 숨어 행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얼른 끝내고 싶었다.

어느새 빵은 사라지고 감싸고 있던 종이봉투만 남았다. 거칠게 마른 빵을 허겁지겁 먹은 탓도 있지만 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연거푸 물을 마셨다. 물통을 세 번째 비우고 나자 허무한 포만감만이 허기를 대신해 자리를 차지했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이러려고 내가 여기까지 온 건가 하는 낯설지 않은 자괴감이 찾아왔다. 낯설지 않긴 개뿔. 바로 어제도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론세스바예스 주변엔 식료품 가게가 하나도 없다. 두어 개의 식당만 있을 뿐이다. 순례자 메뉴 9유로. 스페인의 다른 식당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지만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는 금액이다. 다행히 아침에 생장에서 산 바게트가 조금 남아있었다. 다행인 건가. 대식가라고 말할 순 없지만 성인 남성의 평균 식사량의 두 배 정도가 정량인 사람이 하루에 바게트 한 개. 끔찍하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내 형편을 누군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길을 나서기 전 가장 먼저 했던 각오다. 신세 지지 말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던 영화의 유명 대사처럼 결국 스스로 비참하고 비굴해질 수 있는 상황을 멀리하자. 그래서 식사 시간을 공유하지 않으려 했는데 첫인사부터 식사하셨냐고 묻는 한국인답게 사비나 아주머니의 잽이 급소를 위협했다.

 

“안드레아는 저녁 식사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는 식당가서 먹기로 했는데.”

 

길 위의 흔적과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일찍 휴식을 핑계로 사라졌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는 꼭 늦었다는 생각 뒤에 찾아온다. 

 

“아침에 생장에서 빵 사서 먹다 남은 거 있어서 그걸로 때우려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거짓말도 아니고 듣기에 따라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다행히 젊은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 빵으로 끼니를 해결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 배고프다. 아니 이젠 아프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안면 있는 한국 사람들이 식사하러 갈 때까지 참아야 한다. 7시부터 순례자들의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고 했으니 적어도 그때까진 버텨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다. 생장에 오기 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인 바오로 신부님을 오랜만에 찾았다. 그와의 짧은 만남 뒤 내 손에 쥐어진 것이 한국 라면 3봉지와 220mL 소주 한 병이었다. 

 

“귀한 거야. 아껴 먹어. 라면은 한식 고플 때 먹고, 소주는 정말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까지 참았다 마시고.”

 

딱히 한식이 당기는 건 아니었지만 수중에 음식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한동안 구경도 못 했던 라면이라면 더욱 기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이 마냥 절망적이지 않다. 도리어 희망에 가깝다.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참으면 라면을 먹을 수 있어. 라면이야!

 

휴식을 위해 남아있는 일부 순례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덕에 조용한 숙소 안은 작은 움직임도 크게 울렸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배낭 깊숙이 넣어두었던 라면을 손의 감각만으로 꺼냈다. 심 봤다! 마치 산삼이라도 발견한 양 조심스럽게 빵 봉지와 함께 라면을 가슴에 품고 발소리까지 죽이며 순식간에 주방으로 향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물이 보글보글 끓는다. 건더기 수프와 분말 수프를 넣자 환한 소리와 함께 더욱 격렬하게 붉은 물이 끓는다. 한 톨이라도 떨어질까 조심스럽게 라면을 냄비에 넣자 폭발할 듯 끓어오르던 물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역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둑질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손짓 발짓 한 번 할 때마다 한 번씩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피겠지? 그럼 난 뭐야? 훔친 것도 아니고 먹어선 안 되는 걸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는 옹졸함을 감추기 위함인가? 처절함을 들키지 않기 위함인가? 뭐가 됐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건 건가? 자괴감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면이 풀어져 조금씩 색이 변하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찾아왔던 회의(懷疑)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환희(歡喜)가 찾아왔다. 탱글탱글한 면발에 오랜만에 느끼는 매콤한 국물, 거기에 남아있던 빵까지 적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해치웠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국을 떠난 뒤로 가장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맞다. 라면을 먹었었지. 맛있었는데……. 자괴감은 얼어 죽을. 배고파 죽겠는데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어제 먹은 라면 한 봉지 떠올리면서도 입맛까지 다시면서 뭔 똥고집인지.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멜로디처럼 울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고개와 달리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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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센스바예스 알베르게는 (지금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당시엔) 카미노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알베르게입니다. 수도원을 개조한 것 같은 외형인데 한 층에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0년 전엔 굉장히 깨끗하고 좋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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