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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함께] - 4. 내 이럴 줄 알았다.

도리돌2

20.09.17 23:11:39수정 20.11.26 11:50:04추천 6조회 4,218

 한국인을 피해야 한다. 외국인은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르니 호의를 바랄 수도 없고 일정 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니 안면이 있는 저들과 떨어지면 이제 눈치를 볼 일도 사라진다. 그러려면 그들보다 먼저 알베르게를 나서야 한다. 듣기로 그들은 팜플로나(Pamplona)의 공립 알베르게(Municipal Albergue)를 목적지로 했다. 동일인한 목적지였다. 하지만 그곳도 론세스바예스처럼 규모가 큰 알베르게였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면 마주치지 않고 모른 척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러니 그들보다 빨리 출발하기만 하면 길 위에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헉! 늦잠을 잤다. 다른 순례자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알람을 켜지 않은 게 실수였다.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인 일행의 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확실하진 않지만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것 같다. 다행이다. 그들이 먼저 출발했다면 차라리 더 늦게 출발해 길 위에서 만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며칠째 같은 상념이 찾아왔지만 이게 성격상, 여건상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런데 창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회다. 그들이 식사하는 사이에 출발하면 된다. 1분이라도 먼저 출발하면 마주칠 일은 없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는 순간 당연히 식당 안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사비나 아주머니와 론세스바예스에서 처음 만났던 수정, 루다가 마당에 나와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글렀네. 글렀어. 혼자 눈치 보고 혼자 피하는 걸 당연히 모를 이들에게 도망치는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아침 인사를 하고 혹시 하는 마음에 먼저 출발하려다 붙잡혔다. 남자들은 설거지하고 있는데 어두운 거리를 여자들끼리 가기 무섭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도대체 왜 내가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이들의 안전과 안심을 위해 동행을 해야 하는 거지? 이게 말이야 방구야? 하지만 한국에서만 30년을 살아온 평범한 사내는 어머니뻘 되는 여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나름 돌아가지 않는 머리 열심히 굴려서 세운 계획이 허사가 된 것도 서글픈데 답답할 정도로 느린 걸음에 맞춰주고 있다니 더 서글프다. 걸음을 옮길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게… 아쉽지가 않네? 도리어 즐겁네? 그도 그럴 것이 20대의 여자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걷는 걸음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젠장,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이런 놈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집을 부렸던 건데… 내 의지는 한심할 정도로 미약하다. 즐거움과 편안함에 빠지는 순간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다짐은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애초에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상황이나 요소를 포함하거나 아예 예상되는 상황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이게 뭔지… 지금까지 우겨왔던 똥고집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Municipal Albergue(무니시팔 알베르게)가 공립 알베르게를 말하며 마을마다 하나쯤 있고 가격도 보통 5유로로 가장 저렴하다. 순례자들이 올라(olla, 안녕)하고 건네는 스페인 인사 외에 자주 들었지만 정확한 발음을 몰랐던 부엔 카미노(Buen Camino)는 순례자에게 혹은 순례자들끼리 걸음의 안녕을 위해 나누는 인사였다. 우표는 쎄요(sello)라 부르며 보통 담뱃가게(Tabaco)에서 살 수 있다. 누구나 알지만 나만 모르는 값진 정보를 얻은 보람에 또 다른 정보를 새롭게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덤으로 안고 슬그머니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팜플로나에 도착해선 자연스럽게 일행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젊은 여자들, 정보의 공유만이 일행으로 들어가는 요인이 된 건 아니다. 가장 큰 목적은 끼니의 가성비였다. 육류를 포함한 풍족한 저녁, 하루를 시작하기 충분한 아침과 간단하지만 허기를 달래줄 점심을 위해 필요한 금액은 장보기와 재료 준비 등 인건비를 제외하고 한 명당 5유로 정도였다. 계획이 보존하지 못할 액수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억지로 오기를 부르고 있었을 뿐 하루에 6유로로 숙식을 모두 해결하겠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고집이었다. 돈에 대한 부담을 놓고 나니 모든 게 편하다.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배고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좋아하던 술도 이젠 선택할 수 있다. 처음부터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계획을 세운 게 잘못이었다. 막다른 곳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덤빌 수 있듯이 계획도 그렇다. 비켜 가거나 돌아갈 틈조차 막아버린 계획은 결국 가장 지양하던 방향으로 내몰려진다. 계획은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실패로 얻어진 결론은 꽤 만족스럽다. 머리로만 그리던 그림의 결과는 현실에서도 항상 같을 수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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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똥손이라 사진 다운 사진이 없어서 3년 뒤 봄에 다시 그 길을 걸을 때 찍은 사진도 올려봅니다.

일행이었던 분들의 초상권도 있고, 산짐승 같은 제 얼굴을 올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인물 사진을 빼다 보니 더 사진이 없네요ㅎㅎㅎㅎㅎ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전 개인적으론 봄에 걷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늦여름은 추수가 끝나서 마른 풍경을 마주하는 날이 많은데 봄에 가니 그 마른 땅에 아름다운 색들이 물결치고 있더라고요.

봄의 카미노 강추!!!!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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