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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함께] - 5. 일행(日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일행(一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도리돌2

20.10.02 23:36:12수정 20.11.26 11:49:03추천 6조회 2,314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4시 40분이다. 사비나 아주머니를 비롯해 용식 형님, 수정, 루다가 묵고 있는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5시 반이었으니 여유가 충분했다. 다시 눈을 감고 앞으로 할 일을 미리 그려나갔다. 간단히 씻고 짐을 정리하기까지 대략 15분, 다른 일행이 묵고 있는 알베르게까지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으니 넉넉잡아도 30분이면 충분했다.

 

‘10분만 더 있다 일어나자.’

 

잠은 완전히 달아났지만 아직 정수와 준영도 일어나지 않아 괜히 먼저 일어나서 부산 떨 필요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해결되지 못한 불편한 응어리가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짓누르는 탓에 서두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틀 전 준영은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대도시의 복잡함 속에 길을 헷갈려 팜플로나에서 약속했던 알베르게를 지나쳐 다음 마을까지 가버렸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땐 되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와버려 근처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다음날 길 위에서 잃어버렸던 막내를 다시 만나 7명이 된 일행은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생장을 출발해 벌써 다섯 번째 목적지인 에스테야(Estella)로 향하는 길은 그들과 발을 맞추던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의 끝자락에 알베르게를 나서 함께 시작한 걸음은 서서히 각자의 호흡에 따라 달라졌다. 서로에게 걸음이나 휴식을 강요하는 일 없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휴식과 걸음을 결정했다. 만약 걸음까지 일행이라는 울타리에 갇힌다면 벌써 일행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골짜기 너머로 보이는 에스테야를 앞두고 오늘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빠른 걸음으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왔으니 일행과 거리는 꽤 떨어졌겠지만 마을에서 기다리나 여기서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어제 준영을 만나 일행을 기다린 뒤 함께 알베르게에 들어간 덕에 8인실에 7명만 묵는 행운을 얻었다. 일행끼리 묵는다는 편리함도 있지만 서양인 특유의 체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다른 일행도 반기는 부분이었다. 앞으로의 일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생기길 바라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준영과 정수는 일찍 도착했는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다른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길 포기하고 마을로 들어갔다.

 

 

“왜 계획대로 안 한 거야?”

 

사비나 아주머니의 나무라는 듯한 퉁명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그 어둠이 기억 속 불편한 내 마음인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숙소 안인지 헷갈렸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분명 웃고 있었다. 목소리나 말투도 장난스러웠다. 그런데 그 속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속이 매슥거릴 정도로 불쾌했다. 약속했던 알베르게가 아닌 다른 곳에 등록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다. 현지인과의 소통 문제도 있었지만 단순 실수였다. 

 

“죄송해요. 저희는 거기가 약속했던 그 알베르게인줄 알았어요.”

 

어차피 같은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다. 빨리 걸으면 십 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고, 서로를 찾아 헤매거나 마음 졸일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에게 변명하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잘 찾아봤어야지. 그러다가 또 잃어버리면 어떡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팜플로나에서 준영과 엇갈린 이후 그녀는 통제와 계획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지시로 이어졌다. 그녀의 말투나 행동은 마치 학생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 같았다. 인솔 교사와 학생들, 이건 뭐 수학여행 온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이 무리를 만들자고 제시하지 않았다. 관계의 지속이나 지향에 대한 약속이나 계약도 없었다. 그저 같은 곳을 향해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저마다 필요한 목적에 의해 자연스럽게 뭉쳐진 것뿐이다. 이들 중 누구도 타인을 구속하거나 강압할 권한은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구속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구속은 누구 한 명의 의지가 아닌 집단이 가진 힘이었다. 집단을 통해 얻는 이득이 정보 공유와 가성비 좋은 식사와 즐거움 등이라면 감수 해야할 손해는 집단이라는, 무리나 일행이라는 이름의 구속이었다. 아직 내 걸음 전부를 결정할 만큼 큰 구속은 아니었지만 점점 커지는 구속에 얽매여 조만간 빠져나가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만 같았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동행을 포기하면서 잃게 될 것들이 더 많았지만 불편한 마음을 다리에 묶은 채로 걷는 것보단 홀로 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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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진에 두서가 없습니다.ㅋㅋㅋㅋ
이야기의 시점인 9월의 사진과 3년 뒤에 다시 걸을 때 폰으로 찍은 사진+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뒤죽박죽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다시 저 길을 찾게 되면 더 좋은 카메라와 실력을 겸비하려합니다.

근데… 그날 올지…ㅠㅠ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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