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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함께] - 7. 착각의 늪

도리돌2

20.10.14 21:49:21수정 20.11.26 11:48:47추천 6조회 5,787

 몸은 지쳐 끝도 한도 없이 늘어지는데 잠은 오지 않는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공차는 소리, 쉬지 않고 주변을 날아다니며 이따금 몸에 착륙을 시도하는 파리들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작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리는 또 하나의 숨소리 때문이다. 

 

 아침 로스아르코스를 등지며 일행은 두 패로 나뉘었다. 일정 문제로 비교적 빨리 걸을 필요가 있던 사비나 아주머니와 용식 형님, 정수가 한 무리가 되어 앞서 나갔다. 그리고 일정에 여유가 있던 나를 포함한 네 사람-수정, 루다, 준영은 약 십팔 킬로미터 정도 거리의 비아나(Viana)까지 짧은 거리를 걸었다.

 

 잠이 오지 않는 데는 평소보다 약 십 킬로미터나 적게 걸은 탓도 분명 있다. 하지만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실눈을 뜨는 순간 모든 이유가 그녀에게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15㎡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이제 만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남자와 단둘이 누워있다는 사실이 이 여자에게 아무런 부담이 안 되는 걸까? 긴장돼서 잠은 고사하고 숨소리도 최대한 죽이는 내 입장에선 눈앞의 이 여자가 그저 신기하다. 다시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아무래도 잠을 자긴 틀린 것 같다. 

 

 

 론센스바예스에서 도둑질 같았던 식사의 여운은 국물까지 완벽히 비운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는 식사였지만 고통에 가까운 허기를 이겨냈다는 사실과 이젠 식사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홀가분해졌다. 라면 봉지를 품에 안고 주방으로 내려와 식사를 마칠 때까지의 기민했던 동작은 완전히 사라졌다. 느긋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 앞에 섰을 때 지금까지 없었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전 마당에서 만났던 한국인 무리 중 한 여자였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며 주방을 가득 메운 익숙한 냄새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뜨끔했지만 이미 상황이 끝났기에 스스럼없이 냄새의 정체가 라면임을 밝혔다. 식당에 사람이 너무 몰려 알베르게 구경을 하고 있다던 그녀는 조금 더 일찍 주방을 찾아 한 젓가락이라도 얻어먹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낯설다. 여행지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겠지만 내겐 낯선 일이다. 강한 인상과 덩치 때문에 처음 만난 이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경계하는 게 더 익숙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원래 성격이 밝은 탓도 있겠지만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경계심이 없다. 먼저 말을 걸어준 건 고맙지만 이 상황이 낯설고 불편하다.

 

 

 수정이 기억 속에 남은 첫 장면이었다.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낯선 남자를 대할 때도 변하지 않는 밝음,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활기찬 목소리와 말투, 작은 키에 마른 몸, 평범한 얼굴. 딱 내가 좋아할 만한 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인상에 대한 평가이지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기거나 미래지향적 계획을 가진 건 아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단둘이 방에 있는 게 처음도 아니다. 뿌엔테 라 레이나에서도, 로스아르코스에서도 한 방에 단둘만 남은 적이 있었다. 다르다면 그때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지금은 침대가 없는 방바닥에 한 사람 누울 정도의 공간을 두고 나란히 누워있다는 차이 정도다. 고작 그 정도로 이렇게 신경이 쓰인다고? 내가? 그저 혈기만 왕성한 고등학생처럼? 어이가 없다. 어이가.

 

 뒤척이는 것도 지겨워 몸을 일으키자 수정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곧이어 일어났다. 다행히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은 발생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대화는 별다른 문제 없이 꾸준히 이어졌다. 

 

 교대를 졸업했지만 번번이 임용고시에 탈락하는데 계속 도전을 해야 하는 건지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같은 영어학원에 다니며 친해진 루다를 꼬셔 어렵게 왔다. 계기는 지금껏 만난 대부분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울루 코엘류의 ‘순례자’를 읽었거나 영화 ‘The way’를 본 경우가 많은데 수정은 후자였다. 답답한 현실에서 이 길을 걸으면 막연하게나마 원하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역시 다른 이들과 비슷했다. 메세타라는 약 100km의 사막 지역은 버스를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일정에는 여유가 조금 있었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 마드리드 공항에서 출국하기 전까지 하루나 이틀 정도 묵을 숙소를 고민하고 있었다. 

 

 누구와도 나눌만한 그런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 속에서 수정은 여전히 그 밝음을 유지하며 설레는 말과 행동도 거리낌 없었다. 응? 설렌다고? 왜? 철없는 농담과 장난에 귀엽다고 말 해줘서? 장난 속에서라도 머리를 쓰다듬어 줘서? 미쳤어? 왜 안 하던 짓 하고 그래?

 

 호감. 그래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이성을 만났을 때 외모나 성격을 보고 마음에 들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음에 든 이성을 보며 한 번쯤 만나 보고픈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연애라는 것을 해 봤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느껴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가끔 사랑이나 연애를 하고 싶다. 그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극적으로 변해 버린 가슴은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감정을 키우고 다가가는 것을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라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거지? 그것도 고작 귀엽다는 한마디에? 머리 쓰담쓰담에? 아니다. 고작 그 한 마디에 없던 감정이 갑자기 생긴 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수정에게 감정을 키우고 있었던 건가? 도대체 왜? 수정의 행동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했지 결코 내게만 특별하거나 유별난 적이 없었다. 일행 중 그저 예쁜 막냇동생인 준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그녀가 내게 갖는 호감의 표시라고 착각할 만큼 어리숙하진 않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감정이 생겨난 거지?

 

 “이것 보세요. 김수정 씨. 이래 봬도 내가 자기 객관화가 된 사람이거든? 나도 내가 산 도적같이 생긴 걸 잘 아는데 귀엽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을 감추기 위한 농담이었다. 아직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커진 건 아니었지만 이 어색한 감정의 근간이 무엇인지 찾기 전까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아니에요. 오빠 그렇게 무섭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리고 진짜 가끔 보면 귀여운 면도 있어요.”

 

 “어머, 얘 좀 봐. 자꾸 그런 소리 하면 설레잖아.”

 

 “진짜 설레요?”

 

 “조금? 오빠한테 그런 소리 하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은데. 어떠니? 그냥 오빠한테 시집올래?”

 

 살짝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이 수정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한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럴까요? 잘해줄래요?”

 

 젠장, 당했다. 역시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착각을 부추기는 마약이다. 지금까지 여러 이성에게 해왔던 농담을 똑같이 던졌고 그 대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수정의 대답을 듣는 순간 감정은 이성을 밀쳐내고 모든 흐름을 긍정의 길로 끌어당기려 했다. 보이지 않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안 돼! 착각하지 마. 경험도 철도 없던 질풍노도의 시기나 어리숙하던 20대 초반도 아니잖아. 고작 만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야. 내가 갖는 이 감정도 착각이고 수정의 행동도 내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이야. 그러니 착각하면 안 돼. 정신 차려!

 

 

 

 

 - 시나브로

 

 

 이 길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가리비 표시만 따라가면 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모든 갈림길에 가리비 표시나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닥에 장난스럽게 그려진 노란색 화살표뿐이었다. 이놈들은 아무리 낙서를 좋아해도 그렇지 이런 산속까지 들어와서 바닥에 낙서를 하나? 그것도 이렇게 볼품없게? 생장을 떠나 피레네 산을 넘을 때 아스팔트 바닥에 그려진 그 노란색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준단 사실은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당연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 수밖에 없는 사소한 것들도 나만 모르고 있었다. 과연 이런 놈도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걸음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었고 알든 모르든 걸음은 다른 순례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과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 씨에스타가 시작되기 전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한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냄비 밥이나 간단한 찌개 몇 가지의 한식뿐이지만 이곳에서 다른 순례자들의 요리를 어깨너머로 나마 배워 매일 다른 메뉴로 요리를 했다. 메뉴 선택과 재료는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주방 탐색 후 결정할 수 있다. 이전에 묵었던 순례자들이 사용하고 남기고 간 재료들의 양을 확인해서 스파게티 면이 많으면 스파게티를, 쌀이 많을 땐 쌀밥과 다른 재료를 더 해 반찬을 만들었다. 돈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이 방법 역시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라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였다. 씨에스타를 느긋한 휴식으로 보내고 저녁 식사와 간단한 음주 혹은 휴식을 취한다. 호흡을 맞춰 누군가와 걷고 함께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일부러 거부하고 부정하던 것들인데 이마저도 걸음 속에서 어느샌가 익숙해져 있었다. 

 

 생장에서 받은 마을 간 거리와 알베르게 정보 등이 담긴 안내지를 이용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음에도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란 게, 먼저 남은 일정을 상정하고 그 날짜에 맞춰 대략 하루에 걸을 거리를 정한다. 만약 600km에 30일의 시간이 남았다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대략 20km 정도이다. 마을 간의 거리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곳은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20km도 넘게 떨어진 곳이 있다. 그렇기에 마을 간 거리를 합쳐서 계획된 거리를 맞추다 보면 어떤 날은 20km를 훌쩍 넘기거나 20km에 한참 못 미치는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날도 올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몇 번의 수정을 거치다 보면 대략적인 계획이 나오는데 기간과 상황에 여유가 있는 준영은 크게 연연하지 않았고, 수정과 루다는 아직 확실한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일행 중 남은 일정이 가장 여유롭지만 그 일정 보다 일찍 끝내기도 부담스럽던 탓에 일찌감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수정과 루다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신들의 일정에 참고한다며 내 일정을 적어갔다. 

 

 아이러니하다. 아무것도 몰라 질문하고 도움만 받던 무지렁이가 이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적응을 잘해서? 아니다. 똑같다. 다르다면 체력이 조금 좋고 빨리 걸을 수 있다는 사실과 나이 말고 일행과 차이는 거의 없다. 도리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내 입장이 훨씬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기 있다. 나뿐 아니라 모두 각자의 걸음을 걸어 이곳에 있다. 시작이 어떠했든 과정이 어떠했든 누가 더 뛰어나고 대단할 것 없이 시나브로 각자의 방식과 특성대로 익숙해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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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라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속 이야기는 모두 사실에 기반하였습니다.

내용 속 인물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누군지 밝히진 않겠지만 한 명만 본인의 요청에 따라 본명을 사용했습니다.

인물의 성격과 말투, 행동은 이야기 진행에 맞게 조금의 각색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순례길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확실한 기간 제한 없이 해파랑길 걷기 위해 내일 부산에 갑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달 가까이 늦게 출발해서 생각보다 추워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뭐..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죠ㅋㅋㅋㅋㅋ 사실 완주에 목적은 아니기에 며칠 만에 복귀할지 모르겠네요. 상황 안 좋으면 당장 하루만에 그만둘지도ㅋㅋㅋㅋㅋ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응원주시는 많은 분들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진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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