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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뻥뚫리는 슛팅의소유자 원조득점기계 무결점스트라이커 의리의싸나이

조운자룡

10.05.18 14:46:13추천 5조회 2,250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본명 : Gabriel Batistuta)


 

출생 : 1969년 2월 1일, 신체 : 키 185cm, 체중 73kg 아르헨티나

 

 

1969년 2월 1일, 아르헨티나 레꼰퀴스타에서 출생.

1988년, 아르헨티나 1부리그 뉴웰스올드보이스에서 데뷔, 4골 터뜨리며 팀 우승에 기여.

1989년, 리버플레이트를 거쳐 보카 주니오스로 이적.

1991년, 이탈리아 피오렌티나 입단. 이적료 230만 달러.

1992/1993시즌, 16골 터뜨리며 맹활약했지만 피오렌티나는 세리에B로 강등. 바티스투타, 세리에A 팀들의 이적 제의 모두 거절.

1993/1994시즌, 26경기 16골. 1년만에 팀을 세리에A로 되돌려놓다.

1994년 6월, 미국월드컵 그리스전에서 해트트릭.

1994/1995시즌, 시즌 개막 이후 팀이 치른 11경기에서 모두 득점. 11경기 연속골로 이탈리아 기록 경신. 32경기 26골 세리에A 득점왕.

1996년 4월, 볼리비아전에서 1골 추가해 팀의 3-1 승리를 이끎과 동시에 마라도나가 갖고 있던 아르헨티나 역대 A매치 최다골 기록(34골)과 동률을 이루다.

1996년 5월, 아탈란타와의 이탈리안컵 결승전에서 1,2차전 모두 골을 터뜨려 우승. 피오렌티나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1년만에 처음 얻은 트로피이자 바티스투타의 9년간 피오렌티나 생활에서 유일한 우승.

1997년 4월, 바르셀로나 누캄에서 열린 UEFA컵 4강전에 동점골 작렬. 당시 골을 넣고 10만 관중을 향해 펼친 '쉿~' 세리머니는 지금까지 이탈리아 축구의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1997년11월, 10개월만에 아르헨티나 대표팀 재발탁.

1998년 6월, 프랑스월드컵 자메이카전에서 해트트릭.

1998/1999시즌, 리그 첫 13경기에서 13골 몰아쳐 피오렌티나를 중간순위 1위에 올려놓음. 그러나 불의의 무릎부상으로 결장하는 사이 팀은 악전고투, 3위로 시즌 마감하다.

2000년 1월, 1999년 FIFA 올해의선수상 투표에서 히바우두-베컴에 이어 3위. 피오렌티나 소속으로 152골째를 터뜨려 1950년대 스웨덴 출신의 커트 함린이 갖고 있던 종전 팀내 최다골 기록을 경신하다.

2000년 5월, 시즌 마지막 경기서 해트트릭. 피오렌티나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탓에 세번째 골을 넣은 뒤 울음을 터뜨리다. 피오렌티나 통산 269경기, 168골.

2000년 여름, 3천380만 달러에 AS로마 합류.

2000/2001시즌, 20골 터뜨리며 AS로마 우승 진두지휘.

2001/2002시즌,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극도의 부진. 불과 6골 득점.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대표팀 은퇴.

2002/2003시즌, 벤치 멤버로 전락한 뒤 인터밀란으로 임대.

2003년, 카타르 알 아라비 입단.

2004년, 첫번째 풀타임 시즌 동안 25골 작렬.

2005년 3월, 무릎 부상이 심각해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계약 종료. 선수 은퇴 선언...


 

 


 

▣ '바티골'의 축구 인생 ▣

▶ 바티스투타와 아르헨티나 대표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1991년 3월 27일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데뷔전을 갖는다. 이 때의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루게리, 고이코에체아 그리고 카니자와 같은 주축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티스투타도 선발 명단에 포함 되었으나 골을 기록하진 못했다. 대신 당시 바람의 아들로 불리워졌던 카니자가 결승골을 터뜨리며 아르헨티나의 1 : 0 승리를 이끌었다.

9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천하무적의 팀 이었다. 켐페스와 파사레야의 활약으로 자국에서 개최됐던 78 월드컵 우승이나 마리도나의 신들린 활약으로 우승했던 86 월드컵 때와 같이 무척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활약했거나 현재 활약중인 재능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국제경기 33게임 무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바티스투타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첫 대회는 91 코파 아메리카 였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거머줬고, 바티스투타는 6게임에 출장하여 6골을 터뜨리며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다. 이것이 바티스투타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유럽의 명문 구단들이 바티스투타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결국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가 그를 데려갔다.

아르헨티나는 94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은 자국 대표팀이 월드컵을 차지할 수 있다는 야망에 휩싸여 있었다. 비록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B로 강등 되었지만 바티는 자신의 실력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고, 월드컵에 대비해 만반에 준비를 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마라도나의 컴백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예선 첫 경기에서 바티의 해트트릭과 마라도나의 골로 그리스를 4 : 0으로 대파했고, 두번째 경기에서는 카니자의 2골로 나이지리아를 2 : 0으로 완파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팀의 상승세에 제동을 건다. 경기 후 실시된 약물 검사에서 마라도나가 양성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팀 분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마라도나는 팀을 떠나야 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16강전에서 루마니아에게 2 : 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94 월드컵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94 월드컵 후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다니엘 파사레야가 새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이것은 바티의 대표팀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다 줬고, 새 대표팀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97 코파 아메리카 준준결승에서 브라질에게 승부차기로 패하면서 탈락한다.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은 바티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바로 예선이 진행되는 약 1년여동안 대표팀을 들락날락 거린 것이었다. 비록 대표팀에 차출 될때마다 골을 기록했으나 파사레야는 바티를 팀의 중심으로 생각치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바로 이 때 바티는 마라도나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기록을 깨뜨리며 새로운 기록 보유자가 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98 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불운을 맛봐야 했다. 비록 바티는 5골을 넣으며 대활약을 펼쳤지만 팀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결국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이 경기에서 파사레야는 바티스투타를 크레스포로 교체시키지만 크레스포가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이것이 파사레야 시대의 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4년 후, 바티스투타는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또 다시 전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들은 그가 3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늙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바티가 독일의 게르트 뮐러가 갖고 있는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14골)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랬다. 바티는 94년과 98년 대회에서 각각 4골과 5골씩을 성공시켜 총 9골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표팀의 지휘봉은 비엘사가 잡고 있었다. 2001년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며 아르헨티나를 남미 지역 예선 1위로 이끌었던 이 명장은 파사레야와는 달리 바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절정에 오른 크레스포는 다시 한 번 바티의 아성에 밀려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린 바티는 이때까지만 해도 변함없는 아르헨티나의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의 라이벌전에서 그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고, 스웨덴과의 3차전에서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탈락을 지켜보며 굵은 눈물 방울을 훔쳐야 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바티의 눈물을 지켜보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batistuta_wc2002.jpg    바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지만 그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바티스투타의 프로 경력

다른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바티스투타의 초반 프로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바티는 1년에 $20,000를 받고 1988년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그의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 바티는 가끔 주전으로 뛰기도 했지만 별로 주목받지는 못했고, 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데포르티보 이탈리아노로 임대된다. 임대된 이후 바티는 1989년에 'Viareggio' 대회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지만 팀은 아쉽게도 바티의 20번째 생일날 토리노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바티는 파워를 이용한 골결정력으로 팀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는 성공한다. 그 후 바티는 세티미오 알로시오로 팀을 옮긴 후 다시 레이날도 메를로가 지휘하던 리베르 플라테로 이적한다. 팀의 이적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고, 바티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를린 감독의 후임으로 관계가 좋지 않던 파사레야가 부임하면서 상황이 다시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바티는 단 한 경기도 출장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침울함이 점차 노여움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리베르 플라테를 떠나 보카 후니오르스로 이적한다. 그러나 보카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팬들의 팀에 대한 압력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91년 1월 오스카 타바레즈가 보카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팀개편이 이루어졌고, 새 감독은 각 선수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보카는 점점 강팀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한다. 비록 아르헨티나 챔피언쉽을 차지하는데는 실패하지만, 바티는 꾸준히 득점을 하며 그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로나,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피오렌티나와 같은 유럽 구단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로 이 때 바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으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고, 팀의 우승을 이끌어 낸다. 피오렌티나의 부회장인 비토리오 세치 고리는 바티의 재능과 엄청난 골 감각을 보고 그를 피오렌티나로 데리고 온다. 피오렌티나에서도 바티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 그리고 동료와의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바티는 원만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장애물들을 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티는 득점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골들이 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피오렌티나 팬들도 점차 아르헨티나에서 온 재능있고 성실한 이 금발의 젊은이에게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1992년 2월 26일, 유벤투스전에서 성공시킨 결승골을 시작으로 '바티골'의 신화가 시작된다. 유벤투스전 이후로 아무도 바티의 득점 행진을 막지 못했고, 바티는 제노아전에서 두 골, 포지아전에서 해트트릭 그리고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두 골을 넣는등 골폭풍을 몰고온다. 그러나 이런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바티는 어떤 개인상도 받지 못했고, 팀도 리그 12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더욱이 다음 시즌엔 라우드럽과 에펜베르크와 같은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B로 강등되고 만다. 그 후 팀의 새 감독으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들어온다. 라니에리는 바티를 감독했던 6명의 이탈리아 감독들(라자로니, 라디세, 아그로피, 말레자니, 트라파토니)중 한 명 이었다. 그리고, 라니에리의 지도 아래 바티는 그의 첫 리그 개인상을 수상한다.

바티는 팀의 중심이 되었으며, 세리에 B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남기로 결심한다. 피오렌티나에 대한 바티의 자부심과 애정이 결국 페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다시 올려놓는다. 바티의 용기와 승리에 대한 집념이 세리에 B에서 뛴다는 수치심을 극복하게 했고, 마침내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다시 복귀시킨다.

batistuta_statue.jpg다시 세리에 A로 돌아온 바티는 11주 연속골 이라는 새로운 골 기록을 세우며 30년 동안 볼로냐의 파스쿠티가 가지고 있던 연속골 기록을 갈아치운다. 바티의 수준과 재능이 이 도달하기 어려운 기록을 달성하게끔 했다.

또한 이 해는 'la bandierina(코너 깃발)'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골을 넣은 후 바티가 코너 깃발을 이용해 하는 아주 인상적인 골 세레모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95-96 시즌에 다가올 전주곡에 불과했다. 피오렌티나는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3위를 차치해 당당히 UEFA컵에 출전했으며, 5월 18일 베르가모에서 아탈란타를 물리치고 '코파 이탈리아'를 차지한다. 4개월 후, 바티는 '산 시로'에서 바레시가 이끄는 밀란 수비진을 농락하며 멋진 2골을 뽑아내 피오렌티나에게 '수퍼 코파'를 선사한다.

또한 이 해에 바티는 그의 세리에 100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101번째 출장인 라치오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피오렌티나에서 직접 제작한 실제 바티의 사이즈의 대형 이미지 동상을 받기도 한다. [사진: 피오렌티나의 '신' 바티스투타. 그의 동상은 아직도 피렌체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세워져있다.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한 덕분에 바티와 피오렌티나는 유럽 컵 위너스 컵 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다. 피오렌티나는 다름아닌 바티의 활약으로 글로리아 비스트리아, 스파르타 프라하, 벤피카등을 차례로 물리치고 준결승에서 프리메라 리가의 거물 바르셀로나와 맞닥들이게 된다. 이것은 바티와 호나우두간의 라이벌 관계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원정 경기에서 바티가 호나우두가 침묵을 지키는 틈을 타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리며 누 캄프에 모인 9만명의 바르카 팬들을 침묵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티는 이 경기에서 경고를 받았고, 이것으로 인해 피오렌티나에서 벌어질 2차전에 출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바티의 결장을 이용해 바르셀로나가 결승에 진출한다.

97-98 시즌이 개막되고 바티는 우디네세 전에서 해트트릭, 피렌체 전에서 2골을 넣으며 2경기 만에 5골을 작렬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시즌에 바티는 세리에 A 통산 100번째 골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다음 시즌 세계적인 명장 지오바니 트라파토니가 피오렌티나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고, 그 덕분에 바티는 계속 팀에 머물수 있었다. 트래파토니는 바티에게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 우승으로 이끌자고 격려했고, 정말로 피오렌티나는 바티의 활약으로 시즌 중반까지 리그 1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승을 향해 힘차게 진군하던 바티와 피오렌티나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된다. 바로 2월 7일 밀란과의 경기에서 바티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며, 무려 한달 동안이나 결장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바티는 부상에서 회복했으나 이미 팀은 주장을 잃은 것에 당황하며 라치오에게 우승을 넘겨준 뒤였다. 이 시즌, 피오렌티나는 리그 3위로 마감하며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따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99-2000 시즌, 피오렌티나는 바티스투타를 지원할 미야토비치, 키에사 그리고 발보를 영입하며 다시 한번 세리에A 제패에 나선다. 그러나 이번 역시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바티는 오프 시즌에 정 들었던 피오렌티나를 떠나 AS 로마로 팀을 옮긴다.

그리고 마침내 바티는 프란체스코 토티라는 불세출의 스타와 함께 로마에서 이탈리아 제패의 꿈을 이룬다. 00/01 시즌에 바티는 무려 20골을 폭발시켰고, 올림피크 스타디움에서 펼쳐졌던 최종 라운드에서 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골을 터뜨리며 감동적인 세레머니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바로 바티가 로마의 유니폼을 입고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을 방문했던 일이었다.

바티는 피오렌티나 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종료 직전에 대포알같은 중거리슛으로 오랜 동료 톨도를 무너뜨리며 결승골을 성공시킨뒤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루이 코스타가 바티를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관중들 또한 울음을 참지 못하며 과거의 영웅 '바티스투타'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제 바티는 인터 밀란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카타르로 건너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불태우기를 원한다. 앞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바티스투타의 이름은 서서히 지워져가겠지만, 그가 이탈리아와 세계 축구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빛나는 업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 바티스투타를 말하는 사람들 ▣

"나는 많은 팀의 감독을 맡아봤지만 바티스투타만큼 훌륭한 골잡이를 본적은 거의 없다." - 지오바니 트라파토니(전 피오렌티나, 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내 소원이 하나 있다면 바로 바티스투타를 포르투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 마누엘 루이 코스타(현 AC 밀란/포르투갈 대표팀 미드필더,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후 대표팀의 골잡이 부재를 아쉬워하며)

"바티스투타는 정말 놀라운 선수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골을 넣을 수 있을지 깊게 생각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 더욱 놀라운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티스투타의 컨디션이 불과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프란체스코 토티(현 AS 로마/이탈리아 대표팀 미드필더, 바티스투타가 AS 로마로 이적해온 직후 기자들이 바티에 대한 소감을 묻자)

"바티스투타의 위대함은 그와 같은 팀에서 뛰게 되면 100% 깨달을 수 있다." - 프란체스코 토티(00/01 시즌 세리에A 우승을 달성한 이후 인터뷰 중에서)

"내 생애 바티스투타같은 공격수는 본적이 없다. 그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 나카타 코지(현 일본 대표팀/가시마 앤틀러스 수비수, 2002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와 가시마의 연습 경기에서 바티스투타가 혼자 4골을 터뜨리자)

"바티스투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다. 하지만 나 역시 지난 몇년간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 나와 바티가 함께 뛸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으며, 투톱으로 뛰게 된다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 에르난 크레스포(현 인터 밀란/아르헨티나 대표팀 공격수,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비엘사 감독이 자신과 바티스투타를 함께 기용하는 전술을 채택하지 않자)

"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고의 선수를 갖고 있어도 기용하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 디에고 마라도나(전 아르헨티나 대표팀 미드필더/86' 멕시코 월드컵 우승 주역, 2002 월드컵에서 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를 투톱으로 기용해야 한다며)


P.R.O.F.I.L.E

성명 :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
생년월일 : 1969년 2월 1일
국적 : 아르헨티나
신장 : 185cm
체중 : 73kg
주포지션 : 스트라이커
클럽 : 뉴웰스 올드 보이즈(아르헨티나), 리베르 플라테(아르헨티나), 보카 후니오르스(아르헨티나), 피오렌티나(이탈리아), AS 로마(이탈리아), 인터 밀란(이탈리아)
주요경력 : 1991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 1991 아르헨티나 리그 득점왕, 1991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91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993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95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94/95 시즌 세리에A 득점왕, 세리에A 연속 경기 득점 기록(11주) 수립, 1996 이탈리안컵 우승, 사상 최초 월드컵 2연속 해트트릭, 00/01 시즌 세리에A 우승

- 사커라인(www.soccerline.co.kr) -
 

정말 인간적으로도 멋있는....그가 진정한 영웅이네요

 

출처 : 아이러브사커 / Gerrardi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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