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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12-귀족노조(세 번째)

l죠리퐁l

22.05.18 09:16:16수정 22.05.18 09:16:50추천 3조회 7,022

3. 1987년과 계급투쟁


대한민국 노동조합 투쟁의 역사는 매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보여주듯 독재 정권하에서 노동자의 삶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정권을 지나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특히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사회주의 사상이 말살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서민이 대부분인 노동자 집단은 개인주의보다 사회주의 가치를 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주의>는 곧 <공산주의>와 <빨-갱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결국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념과 사상적 기반이 사라진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에 귀속되게 됩니다. 특히 어용노조는 <구사대:회사를 구하는 조직>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기존 노동조합 투쟁을 반 민주적이고 반 사회적인 투쟁으로 규정짓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을 탄탄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는 교육과 함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철저히 말살됩니다. 마침내 노동자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1970~80년대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너무 길어 간단히 나열하겠습니다. 군부 독재정권은 철저히 자본가를 위한 정책과 입법 활동을 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타이틀 아래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발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형태의 경제 발전의 장점은 발전 속도를 빠르게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점이 있지만, 반대로 정부가 경제를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기업에게 큰 혜택이 돌아갑니다. 일종의 정경유착이 형성되는 거죠. 경제라는 분야는 마치 생물처럼 스스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인 발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많은 문제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발전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형태의 발전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빠른 시일에 북한의 경제 수준을 앞질러야 하는 게 군부정권의 최대 목표였죠.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특정  기업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많은 중소기업을 키우기보다는 일부 대기업을 손에 넣고 관리 감독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인 거죠. 게다가 수출주도형 경제 정책은 농업 인구가 대규모로 줄어드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한국이 내수보다는 수출 위주로 경제정책을 하려면 기업의 경쟁력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당시 기술로는 다른 나라와는 경쟁이 안 되었습니다. 믿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죠. 가격. 싼 가격에 제품을 수출하려면 노동자의 임금을 적정 수준으로 묶어두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물가 안정이 필수적이죠.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을 묶어두기만 하면 민심이 들끓으니 물가를 잡는 방법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물가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쌀 값을 안정화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물가의 기준이 쌀 값이었기 때문에 쌀 값만 잡아도 가계 물가는 별로 오르지 않았죠. 결국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인 쌀 값 안정화 정책은 소작을 위주로 하는 농민이나 소 규모 자작농에게 큰 타격이 됩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은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모여들게 됩니다. 가뜩이나 임금이 저하되고 노동 여건이 열악 환 상황에서 노동인구가 대규모로 늘어나니 노동환경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죠? 그렇습니다. 18세기 이전에 유럽에서 벌어지던 농민 대이동이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집니다.

군부정권 시기에 노동 여건은 최악이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노동운동의 기본 신념인 사회주의 경제 이념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논리에 구사대와 어용노조가 판을 쳤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노동자는 끝내는 분신 투쟁의 길로 접어듭니다. 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결국 삶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많은 노동자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려 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노동자의 법적 보호를 이슈화 했듯이 노동자의 죽음은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자본가는 군부 정권과 손 잡고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죠. 특히 많은 여성 노동자와 중, 소기업 노동자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1987년은 한국 노동사에 큰 획을 남긴 해입니다.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민주화 시위는 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냅니다. 민주화 투쟁의 영향으로 산업계에서는 모두 함께 뭉쳐서 투쟁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이에 1987년 7월부터 산업계 전반에 걸쳐 노동자가 근무환경 개선과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는 대 투쟁을 시작합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투쟁을 대 투쟁이라 말하는 이유는 당시 7·8·9월까지 3,458건의 투쟁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 평균 30건이 넘죠. 노동자 대투쟁의 정점이 8월 중순경이었는데 이때는 하루 평균 83건의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참가 인원은 122만 명을 넘어, 10인 이상 사업체 총 노동자 333만 명의 약 37%에 이릅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1,827건(55.2%), 운수업이 1,265건(38.2%), 광업 127건(3.8%)이었으니 집계에 빠진 인원까지 포함한다면 대부분의 노동자가 투쟁 대열에 합류했다고 봐야 합니다. 노동자 대 투쟁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으로 타올랐습니다. 회사 측은 노조 설립 신고서를 탈취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노동조합 결정을 막았습니다. 이는 당시 산업계에서는 노동법이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었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 결성을 용인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 노동조합에 대한 산업계의 인식을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여기에 현대그룹 노동조합 위원장은 “그렇다면 정주영 회장의 눈에 흙을 집어넣겠다.”는 말로 조합 결성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대투쟁은 순식간에 온산, 울산 공단을 거쳐 부산, 마산,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공단지대뿐 아니라 ‘중산층 시민’이었던 사무직, 병원 등에서도 투쟁이 일었고 많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대 투쟁은 노동조합 결성 외에도 최저임금 보장, 임금인상, 근로기준법 준수 등 억압받는 노동자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한 요구가 많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광산 노동자의 이야기를 보면 “올 봄에 광산 노련은 광산노동자 최저생계비를 약 44만 2,000원 정도로 책정했다. 이는 고기라든지 과일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술도 소주로만 계산하고 한 달 술안주값을 5천 원으로 계산한 그야말로 최저 수준의 생활비였다. 올해 한국노총은 4인 가족 최저생계비를 약 49만 원으로 책정했는데 물가도 비싼 광산이 49만 원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한편 광산 노련은 86년 광부의 평균 임금을 39만 5천 원으로 계산했는데 이는 고급 관리직, 사무직도 포함한 데다가 상여금과 장학금까지 합친 다소 과장된 액수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광부는 피로와 재해로 인한 결근으로 이보다 훨씬 적게 받고 있지 않는가?” (『광부의 함성』제3호)

19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노동 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해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노동자의 여건이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자본가와 결탁해서 노동자를 탄압했다면 이번에도 정부가 주도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합니다. 이는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 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죠. 이 결과 공공기관과 공기업을 비롯하여 대기업 사업장 임금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봅니다. 물론 단 한 번에 임금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가시적인 효과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한국 노동 운동이 그나마 활발했던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였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억눌렸던 노동운동이 매우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특히 친 기업 성향의 어용노조 조차도 노동여건 개선을 위해 한 목소리를 냈을 정도니 당시 노동운동은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자의 요구가 다 관철된 것은 아닙니다.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었죠.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많이 올랐고, 공기업이나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복리후생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노동자의 관심이 임금에서 복리후생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임금이 현재 먹고살기 위한 재화라 한다면 복리후생은 미래를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노동자의 임금이 생존과 생활을 만족시켜주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안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위한 단계로 복리후생이 노동자의 관심 사항이 된 것이죠. 3당 합당의 결과물로 태어난 김영삼 정부의 노동 정책은 초기와 중, 후반기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이 김영삼 정권이 반 노동자적 정권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그 태생적 한계와 지난 정권의 행태를 보면 김영삼 정부의 노동자 정책에 대한 평가는 더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고무적인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IMF 경제위기가 도래한 거죠. 하루에 기업 하나가 쓰러질 만큼 한국 경제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노동운동 역시 정지한 상황을 맞습니다. IMF 위기를 이겨내는 시점까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극심한 침체기를 맞습니다.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비 정규직 법안을 비롯하며 많은 법이 기업에 절대적으로 이롭게 만들어집니다. 당시 노, 사, 정 위원회에 양대 노총이 참여를 거절할 정도로 노동 관련 법률은 오로지 친 기업 성향의 법으로 도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 마치 반역 죄인과 같은 꼬리표가 붙어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총파업까지 벌여가며 막으려고 했던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이 법제화되었고 대신 상급단체부터 단계적인 복수노조 허용, 교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합의되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 협약은 부결되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 주관으로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가운데 정리해고제는 국회를 통과했고, 양대 노총은 노, 사, 정위 참가와 철수를 반복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구조조정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전국적으로 ‘고용보장이냐, 임금 삭감이냐. 택하라!’는 자본의 공세에 단체협약도 후퇴했다.-노동운동사->

IMF 경제위기는 노동운동이 기존의 투쟁 일변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노동계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였습니다.

 

노동계는 IMF를 거치면서 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서구사회처럼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을 건설하여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게 된 거죠. <국민승리 21>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당시 노동계의 정치 투쟁은 운동 방침은 권영길, 투표 방침은 김대중을 표방할 정도로 정략적인 형태의 정치투쟁이었지 올바른 의미를 지닌 정치 투쟁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노동계는 드디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여 본격적인 계급투쟁을 시작합니다. 이후에는 원내 정당으로써의 지위를 갖기도 하고, 진보 세력 간의 다툼에 의해 정당이 사분오열 도 기도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한국은 노동을 근본 가치로 삼는 정당이 올바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정치 구조가 아니죠. 지역 기반이 없는 정당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에 휘둘린 국민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한 노동이나 사회주의 정책 정당은 존립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여 그 힘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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