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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의실체]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에프록시아

08.06.18 09:40:47추천 1조회 1,400
 

2001년 4월 2일 <한겨레>(www.hani.co.kr) '심층해부 언론권력' 연재기사


[언론권력]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0050000001200104020302p10177.jpg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 언론계에는 소비재 수출 주도형 경제개발과 이에 따른 광고시장 확대, 신문사간 경쟁 격화를 배경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민족적 친일 곡필로 얼룩진 언론사에 또 다른 곡필의 흐름이 가세한다. 삼성이 창간한 신문 <중앙일보>가 소속 재벌의 치부를 적극 감싸고 돈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국내 첫 `재벌신문'인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됐다. 중앙은 정치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병철씨가 그 대신에 만든 것이다. 1986년에 출판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전기 <호암자전>은 중앙의 창간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기업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해 정부운영과 국가방위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됐다. 이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려는 듯, 창간과 함께 중앙은 삼성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물량공세를 폈다. 무가지를 총 발행부수의 27%까지 늘리고 1967년 당시 국내 초고속 윤전기 8대 가운데 5대를 보유하는 자본력을 뽐냈다. 설립 뒤 5년간의 적자를 내면서도 판매 경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삼성의 자본력이었다.

재벌신문의 폐해에 대한 우려는 채 1년도 못돼 현실로 드러났다. 66년 5월24일 벌어진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부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원을 부과했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국내 굴지의 재벌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던 터였다.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은 중앙이란 재벌언론이 `밀수'를 옹호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밀수가 얼마나 으뜸가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는지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밀수, 그것은 곧 망국이다.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흉악 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럽고 끔찍스러운 범죄 …또한 5·16 이후 이 망국행위를 근절키 위해 특별입법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어떤 밀수항목에게는 사형을 언도한 일까지 있다.”(동아 66년 9월16일 사설 `삼성재벌의 밀수')

같은해 9월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이 밀수사건이 세상에 폭로되자, 중앙은 삼성쪽 해명 논리를 연일 지면을 통해 쏟아부었다.

9월16일치 3면에 `사카린 밀수보도/ 사실과 다르다'는 제목 아래 `직원 개인의 비행이다, 기재 도입에 부당삽입, 즉각 적발 자진신고 했다, 이미 5월에 의법조치' `불미한 행위 회사선 몰랐다'라고 보도했다. 다음날에도 7면에서 당시 부산세관장의 말을 빌려 “정당절차 따라 처벌했다, 밀수품 아니며 내 책임하에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같은날 사설 `기업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도 “이번의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도 정확한 경위가 이미 관계 기관에 의해 발표됐거니와 왜곡되거나 무분별한 흠이 없지 않은 세론이 비생산적이고 인심을 쓸모없이 자극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썼다.

급기야 당시 삼성이 거느리고 있던 동양텔레비전·라디오 등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에 나섰다. 텔레비전의 경우 9월18일 오전 9시30분 교양프로그램 <일요응접실>에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석초씨, 서울대 김기두 교수 등을 출연시켜 비호 방송을 내보냈고, 같은날 저녁 7시 <석양 속의 데이트>에서도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승한씨 등이 나와 삼성을 옹호했다. 동양라디오도 17, 18, 19일에 아침 저녁으로 삼성을 감싸고 돌았다.

이런 보도는 `대재벌이 밀수를 했다-특혜밀수의 정치파장' `국민 분노케 한 파렴치'(동아 9월17일치) 등 다른 신문들 보도나 진상 규명 요구 등 들끓었던 여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중앙의 삼성 옹호는 계속된다.

`벌과금은 한비와 무관'(9월19일치 1면).

`양벌죄 적용 불가 재수사 필요없다/ 한국비료는 관계없고 부산세관 처분도 적법”(9월19일치 7면).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에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9월19일치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

“정계 한 소식통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에 대해 한 재벌을 치기 위해 벌이는 하나의 정치적 장난에 불과하다고 하나의 주석을 붙였다. 그는 그 이유로 한국의 대재벌이 불과 2천만원짜리 밀수를 할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며 앞으로 국회에서 조사단이 구성되면 그때 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파헤쳐 이런 장난을 치는 못된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고 일갈.”(9월19일치 2면)

중앙은 온 국민이 분노하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 규명을 제쳐놓았다. 되레 날마다 지면을 통해 삼성 직원 몇명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불과하고 그에 따른 처벌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수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삼성쪽 주장을 그대로 싣는 `사보' 구실을 했다.

삼성 감싸기 보도가 언론계와 독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자 박정희 대통령이 9월21일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는 편집권 침해 가능성 등 일부 한계가 있었지만 △경영과 편집의 분리 △신문과 방송의 겸업 금지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언론의 공익성 보장을 위한 법률안' 제출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이번 삼성 사건을 보고 재벌이 언론을 독점해 사물시하는 폐단을 막을 필요성이 있다. 재벌과 언론기관의 완전분리, 특정인에 의한 언론기관의 독점소유 배제를 위한 법적 조치를 연구하라.”

대통령까지 나서자 버티던 이병철 당시 한국비료 사장은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언론과 학원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다짐했다. 대검찰청은 9월24일 이병철 사장의 차남인 한국비료 이창희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6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마무리지었다.

이에 대해 신문들은 `국민 기만한 각본수사 이병철씨 무혐의는 모순당착'(동아 10월7일치 3면)이라 비판하고, 사카린 밀수는 빙산의 일각이고 건설자재란 명목으로 세탁기, 양변기, 전화기, 텔레비전도 밀수했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27년이 흐른 93년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초대 사장 전기인 <유민 홍진기 전기>에는 여전히 이렇게 적혀 있다.

“중앙일보는 창간 1년이 못돼 기존 신문 중 최대 발행부수를 지키고 있던 타지를 1만부 앞설 수 있었다. 이것은 경쟁사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경쟁회사들의 견제가 시작된 것은 창간 1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마침 `한비' 사건이 발생하자 경쟁사들은 중앙일보에 포화를 집중했다. 한비 사건은 건설 중이던 비료공장에서 원료로 들어온 사카린 일부가 유출된 사건이다. 이것은 초기에 발견되어 당국의 사법적 조치가 있었고 회사로서도 관계자들을 문책했다. 그런데 몇몇 신문들이 이 사건을 다시 들춰 정치문제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같은해 나온 한권의 책은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을 보여준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병철 삼성회장의 맏아들 맹희씨가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맹희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65년 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을 요즘으로 치면 2000억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냉장고·에어컨·전화기·스테인레스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특별취재반 society@hani.co.kr

 

<출처 : 리얼조중동  www.realcjd.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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