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또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호불호가 갈리는 우남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시절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윽박을 질러 결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없고 국내외에서 백성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으로
미국 호텔방에서 호위호식 하며 지냈고 당시 고가였던 자동차를 타며 스피드를 즐기다 범칙금을 많이 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쓴 하루 식비와 호텔 사용비를 합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1주일 식량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고 하
니 독립자금으로 얼마나 사치를 부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최악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제출한 것 입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 먹으려 한다"며
신채호
분개 했고 곧바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 된 대통령이 되고
임시정부는 신채호와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와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개조파로 나뉘게 됩니다. 현상유지파 김
구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이승만에 의해 자멸할뻔 하게 됩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권한을 잃고 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
다 이후 하와이에서 의형제인 박용만과 대립하여 조선인들 끼리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일으킵니다.
이에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며 당대의 지성인인 안창호 입에서 "이승만은 미치광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박
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작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보다 불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후에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
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과 가족
회를 조직하지만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였던 김구(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여운형(건준), 김규식(미군정), 박헌영(좌익세력)
등에 비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 현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을 조직한 친일파들과 북한에서 탄압받아 월남한 기독교
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당시 사진
같은 해 12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폭발하게 만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립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정기간 신탁통치 뒤 조
선의 정부수립과 자유 선거를 지지 하였으나 미국은 즉각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는 동아일보의 오보(세계 3
대 오보중 하나로 지정 됩니다.)로 좌익과 우익 둘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소련은 민심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는 회의 내용을 전문 공개하며 미국과 같은 입장이라 밝히자 좌익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내용만 알고 회의 내용은 전혀 몰랐던 민중들은 좌익을 비난하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에 반해 우익
은 반탁, 반소련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 = 애국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립군이 대부분이였던 좌익들을 빨갱이라 탄압 하
고(이때 임시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독립군 고문 담당이였던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분개하여 월
북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대부분이였던 우익은 애국자로 변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평생에 가장 후회한다는 반탁에 가담하여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김구에게
찾아가 반탁을 하는것은 좌우합작에 반대되어 민족이 분열될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김구는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 반
탁을 지지 하게됩니다. 다음해 1946년 3월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미국은 좌우합작 단체에 의한 조선의 정부 수립
을 내세웠고, 소련은 찬탁 단체에 의한 정부를 수립을 내세워 서로의 입장차가 생기자 결국 5월에 휴회하게 됩니다.
이때 이승만이 친일파와
정읍발언 당시 이승만
기독교인들을 앞세워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며 정읍발언(1946. 6)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족분단의 위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좌,우익 사이에서도 절대 발언하지 않았던
민감한 사항이였지만 이승만은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미국에게 관심조차 못
받자 이승만이 위기감에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민족 분열 위기를 느껴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
우합작운동(1946. 7 ~ 1947. 12)을 벌이고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여운형이 직접 북한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 3월 트루
먼독트린에 의해 냉전이 시작되어 좌우익 또한 사이가 벌어지고 5월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여운형의 암살(194
7. 7)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문제는 유엔 총회(1947. 11)에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정하지만 북한의 거부로
민족분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구는 반탁입장을 철회
하고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 남북협상운동(1948. 2~ 4)을 전개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미 5월 10일 제헌국회로 불리는
단독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
방북하는 김구
남한 단독선거 반대 평화 시위를 벌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보낸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좌익분자 색
출 명분하에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가하자 제주도민들이 분노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킵니다. (1948년 4월 3일 ~ 1950년 초)이
에 미군정은 군대를 보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여 당시 제주도민 13만명 중에 6~7만명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집니
다. (이 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기 전까지 정부에서 쉬쉬 되어 왔습니다.) 이때 4.3이라는 숫자를 말 만
해도 잡혀갔다고 하니 어느정도로 탑압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제주도민들 중에 좌익세력을 추려내는 모습
제주에 파견되기 전에 서북청년단과 경찰을 위로하는 이승만
최근에 발견된 학살된 유골들
민족분열 때문에 단독 선거 반대의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남한에서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되고(김구, 김규식, 좌익세력 불
참) 7월 17일 헌법 제정, 결국 독립한지 3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됩니다. 이로써 통일 정부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
으며 다음달인 9월 9일에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분단이 되고 맙니다. 미국과 소련의 지지로 민족통일 정
부를 세울 수 있었으나 이승만의 주도하에 여운형, 김구 암살과 박헌영과 좌익세력에게 테러를 앞 세워 방해 결국은 지금까지
도 분단된 민족을 만드는데 김일성과 함께 1등 공신이 됩니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1948. 9)
를 만들어 박흥식, 최린, 이광수, 최남선,노덕술등을 체포하지만 이승만은 좌익 잡는 애국자들을 왜 잡아가냐며 화를 냈고 국
회에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있다며 국회의원들을 고문하고 사형 시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고 노덕술 휘하
의 경찰들은 국회를 습격하는등 친일파들의 입김에 의해 결국
우리 민족의 염원이였던 과거 청산을 실패하게 되며 이후 이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화등등 사회 곳곳에 뿌리
를 내려 지금
반민특위원회
까지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달 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
는데 남한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제주도민 토벌대를 강화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리지만 당시 경상도 지역은 좌익 세력이 경찰과 군대 곳곳에 있었고 좌익세력이 주 인원이였던 14연대 군인들
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와 남북통일을 앞 세워 좌익단체와 동맹휴학에 들어간 학생 청년들과 함께 오전 5시 여수 읍
내를 장악하고 우익세력을 색출한 뒤 곧바로 순천을 오후 3시경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21일 10개 대대 병력
을 보내 여수와 순천을 포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여순사건 희생자들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되고 대대적인 시가전이 펼쳐지지만 화력과 진압군의 병력 앞에서 반란군은 대부분 진압되 일부는 지리
산과 산악 지역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됩니다. 여순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였고 특히 무고한 청년들이 단
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
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한 좌익 최고의 단체
였던 남로당원 박정희의 배신 활약으로 좌익 세력이였던 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숙국작업으로 대부분 사형됐습니다. 이후 미
국에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되고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가 장악 되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에 무기
를 원조 받고 남한을 공산화 하기 위해 조선의용군과 김원봉을 선두로 하여 6월 25일 남침을 합니다. 이승만과 신성모 국
방부장관은 당황하게 되고 이승만은 라디오를 통해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막고 있으니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자며 북한을 도발했던 이승만(오른쪽)과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에서라며
자신만만했던 낙루장관 신성모(왼쪽)
안심 하라며 민심을 추스리곤 정작 자신과 대부분 정치인들은 대전까지 내뺐고, 북한군은 미아리까지 치고 내려왔다는 소식
에 민중들은 급히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때 정부는 한강다리를 건너는 민간인을 무시한체 폭파를 감행하여 많은 민간인 사
상자를 냈고 너무나 이른 시간에 폭파로 라디오만 믿다가 미쳐 피난가지 못한 민간인과 전방 전투에서 후퇴한 군인들은 북한
군에게 많은 피해를 받습니다.
폭파된 한강다리, 부교가 놓이고 나서야 피난을 가는 민간인들
이윤열 당시 사회부장관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이 이범석 국무총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위해 한강 다리
를 폭파 시켰다고 주장하여 윗선에서 결정 됐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애꿎은 채창식 공병감만 사형 당한 체 아직도 누가 명
령했는지 확실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까도까도 양파같은 인물이라는...
출처 : I Love Soccer- 孔子님.